본문 바로가기

BorntoWatch

[二十一世紀映畵讀本]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Directed by Guy Ritchie

 

제목부터 심상찮은 냄새를 풍기는 영화. 기대 반, 그냥 재미 반으로 극장을 찾아갈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웃다가 지칠 정도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의 끝에는 정말 공허만이 남아 있다.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영화가 꼭 심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도된 웃음과 가공된 이야기가 너무나 뻔하게 속내를 드러내면 보는 이의 입장은 정말 난감하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나 시나리오이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잘 이끌고 있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하지만 이런 뛰어난 시나리오는 너무나 잘 꾸며져서 작가의 의도대로 관객이 수동적으로 따라오기를 철저하게 요구하고 있다. 물론 요즘 대부분의 영화의 추세인, 이러한 수동적인 이야기 따라잡기가 영화를 보는 데에 장애요소만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요즘 영화들은 그냥 입을 쩍하고 벌리고 봐야만 한다. '타이타닉'의 스케일, '메트릭스'의 CG, '스몰 숄져'의 신기함)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이렇게 철저하게 관객을 수동적으로 내모는 것이 영화를 보는 방법에 있어 최선의 방법은 아닐 것이다.  

다시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방법에 있다. 그냥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차분히 무언가를 스스로가 정리해 낼 것인가.

어느 한 방법이 영화를 보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단언(斷言)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관객이 좋아하는 영화들이 무작정 영화를 따라가는 수동적인 영화일 필요도 없다.
영화 안에서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드는 그러한 이미지들만이 붕붕 떠다니고 결국 영화는 현실 안에서 발붙일 곳을 잃고 만다. 이게 과연 영화가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전부란 말인가. 그렇다면 과연 영화가 종합 예술이라는 한 가닥의 생명줄을 부여잡을 수 있는 존재의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를 보면서 끊임없이 머리를 맴도는 생각이었다, 한편으로 신나게 웃으면서도.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의 촬영과 편집, 음악 사용들은 이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정도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트랜스포팅', '펄프 픽션' 등등의 흔히 말하는 새로운 감각의 촬영과 편집은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 새롭지 않다. 물론 이상하게 꼬인 시나리오에는 더없이 딱 맞는 스타일이지만 이제는 보편이 되어버린 이런 스타일들은 서로가 서로를 탐닉하며 그 강도(强度)만을 더해간다.

의미 없는 새로움이란 언제나 쉽게 익숙해지고 그 새로움의 매력을 잃어버리는 것일까. 언제나 새로움이 옛 것에 대한 전복(顚覆)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여기의 영화는 오직 새로움만을 위해 달려가는 것 같다. 이 영화에 기존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새로움이 과연 있을까. 각 캐릭터들의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에 우리는 폭소를 터트리고, 문제의 시작과 해결이 우연과 필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기가 막히게 조응할 때 영화는 정말 어이없이 모든 문제를 잠재운 채 한바탕 소란으로 끝을 맺는다. 그 끝맺음이 또 다른 곳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아니 꼭 파장이 아니더라도 조용히 잔물결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면 이런 모든 부딪힘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치부하며 또 다른 새로움을 향해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않을까. 어떠한 모습이 꼭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영화 보기가 필요한가에 대한 조그마한 의문이 든다면 그 의문을 푸는 방법은 이제 정말 우리의 몫인 것 같다. 영화는 그것을 해결해주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리고 저만큼 앞서 달려가는 영화를 따라가는 것도 이제는 너무나 지친 일 인 것 같다.

이제 남은 것은 나에게 맞는 영화를 찾는 일뿐. 그 밖에 영화를 보며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은 너무나 무의미하니까......



* 본 글은 대자보 14호(1999.6.21)에 발표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