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소재로 보거나, 재미로 볼 때 한국에서 개봉되기 힘들 것으로 보이던 켄로치(Ken Loach)의 '레이닝 스톤'은 벌써 한국에서 소개되는 그의 7번째 영화다.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과 '칼라 송(Carla's Song)'은 극장 개봉을, 그리고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Ladybird Ladybird)'는 분도 시청각에서 비디오로 출시되었으며, 다큐멘터리 '명멸하는 불빛(The FLIcke ring Flame)'은 노동 영화제, '하층민 (Riff-Raff)'은 영국 대사관에서, 그리고 최신작인 ' 내 이름은 조 ( My Name is Joe)'는 작년 부산 영화제에서 소개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소개되었던 '랜드 앤 프리덤'은 스페인의 실패한 혁명과 내전을 다룬 영화로 대학가 등에서 야외 상영되는 등 큰 관심을 모았지만 그 이후에 상영된 영화들은 그리 큰 반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사실 켄 로치의 진수는 '랜드 앤 프리덤'같이 스케일이 큰 영화에서보다는 '칼라 송',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그리고 이번에 개봉된 '레이닝 스톤'같은 조그마한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켄 로치 의 필모그라피(Filmography)의 순서는 한국에서 개봉된 순서와 전혀 다르다.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들의 제작 순서는 '하층민' 1990년, '레이닝 스톤' 1993년,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1994년, '랜드 앤 프리덤' 1995년, '칼라 송' 1996년, '명멸하는 불빛' 1997년, ' 내 이름은 조 ' 1998년 順이다.)
켄 로치의 이런 작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은 우리 주변들의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레이닝 스톤'에서도 이런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그것도 최악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이런 최악의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레이닝 스톤'은 답답한 영화이다. 영화 내내 가슴을 짓누르는 이런 답답함은 우리 주변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너무나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거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 주변의 모습들을 또 다시 괴로운 심정으로 만난다는 것은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레이닝 스톤'은 보고 나서 그리 유쾌하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이런 유쾌하지 않음은 영화라는 매체 속에 '재미'외의 다른 것이 있음을 어렴풋이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레이닝 스톤'에서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인물은 주인공인 밥(Bob)이 아닌 신부(Father)이다. 켄 로치의 이번 영화는 신기하게도 카톨릭을 중심소재로 잡고 있다. (이 점은 이 영화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다. 영화의 오프닝에 두 주인공이 속죄의 상징인 양을 잡으러 뛰어다니고, 의도하지 않은 살인을 저지른 밥이 신부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가 그 죄를 사해주는 장면은 이 영화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그리고 그 중심의 한 가운데에 신부가 있다. 이야기의 중심은 딸아이의 성찬의례에 멋진 예복을 안겨주고 싶어하는 정말 답답한 아버지의 억지스럽지만 사랑스런 부정이며, 그 예복 때문에 저지르는 범죄와 신부의 용서와 범죄의 해결이다. 그렇다고 신부가 그 비싼 예복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답답한 실업자의 덧없는 욕심일 뿐이다. 영화는 나지막이 말한다. 우리를 위로한다는, 그리고 우리를 구원한다는 종교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는 때론 엄청난 사치일 뿐이라고.
켄 로치는 몇 안 되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말하는 감독이다. 이 점을 고려하고 영화를 보면 다시금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왠지 무언가 사회주의자 감독의 영화에서 기대하는 혁명을 위한 힘이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이 쉽사리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적인 내용을 담기 위한 혁명적 영화 스타일 (미클라우 얀초(Miklos Jancso))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특징은 주변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일 뿐이다. 켄 로치의 영국 잡지에 실린 인터뷰 내용처럼 진정 켄 로치라는 사회주의자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는 노동자의 주변에서 그들과 같이 호흡하는 영화이다. 그 호흡의 강약과 호흡의 종류의 문제는 켄 로치가 생각할 때 부차적인 것이다. 얼마나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것인가가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런 켄 로치의 의도처럼 '레이닝 스톤'에서 볼 수 있는 영화적 기교는 아주 단순하다. 아일랜드의 질감을 살리기 위한 초반부의 입자 굵은 필름의 사용, 16mm 카메라를 사용한 촬영, 핸드 헬드 촬영, 그리고 자연스러운 카메라의 움직임들을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레이닝 스톤'에서 진정 중요한 영화적 장치는 영화 안과 밖의 보여지고, 보여지지 않는 것들의 결합과 그 결합에서 생기는 힘이다. 화면 안에 잡힌 모습들과 화면 안에 잡히지는 않지만 우리 스스로가 그려낼 수 있는 화면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현실 속의 모습들이 화면 안에서 숨가쁘게 같이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그 호흡은 때론 빠르고, 때론 조용하고, 때론 유머스럽기 까지 하지만 그 모두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노동과 인간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다.
* 본 글은 대자보 18호 (1999.8.14)에 발표된 기사입니다
Ken Loach Filmography
불쌍한 암소 Poor Cow (1967)
케스 Kes (1969) (as Kenneth Loach)
가족생활 Family Life (1971)
블랙잭 Black Jack (1979) (as Kenneth Loach)
외모와 미소 Looks and Smiles (1981) (as Kenneth Loach)
조국 Fatherland (1986)
숨겨진 계략 Hidden Agenda (1990)
하층민 Riff-Raff (1991)
레이닝 스톤 Raining Stones (1993)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Ladybird, Ladybird (1994)
랜드 앤 프리덤 Land and Freedom (1995)
칼라 송 Carla's Song (1996)
내 이름은 조 My Name Is Joe (1998)
빵과 장미 Bread and Roses (2000)
네비게이터 The Navigators (2001)
달콤한 열여섯 Sweet Sixteen (2002)
2001년 9월 11일 11'09"01 September 11 (segment "United Kingdom") (2002)
다정한 입밎춤 Ae Fond Kiss... (2004)
티켓 Tickets (2005), along with Ermanno Olmi and Abbas Kiarostami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The Wind That Shakes the Barley (2006)
자유로운 세계 It's a Free World... (2007)
룩킹 포 에릭 Looking for Eric (2009)
루트 아이리쉬 Route Irish (2010)
엔젤스 셰어 : 천사를 위한 위스키 The Angels' Share (2012)
지미스 홀 Jimmy's Hall (2014)
나, 다니엘 브레이크 I, Daniel Blake (2016)
미안해요, 리키 Sorry We Missed You (2019)
나의 올드 오크 The Old Oak (2023)
- 켄 로치 감독님의 '나의 올드 오크 (The Old Oak)'가 개봉중이다. 꼭 극장에서 봐야겠다. 사실 이 영화 개봉이 너무 반가와서 옛날 글을 찾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