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는 많은 기대를 갖고 기다린 영화다. 이렇게 학수고대 기다린 것은 바로 2001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이상한(?) 모습의 영화로 하루아침에 스타 감독이 되어버린 류승완 감독의 실제적인 충무로 첫 장편 영화이기 때문이다. 류승완식 영화 만들기 또는 류승완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만들기가 과연 이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기다렸다.
물론 이러한 점은 적지 않게 류승완 감독 자신에게는 큰 짐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이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를 만들 때 가장 그의 마음을 혼란하게 했었던 영화는 바로 로버트 로드리게즈(Robert Rodriguez)의 두 영화인 "엘 마리아치(El Mariachi)"와 "데스페라도(Desperado)"이다. "엘 마리아치"라는 재기 넘친 저예산 독립영화가 할리우드에서 "데스페라도"로 옷을 갈아입으면서 변질된 모습을 그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두 영화는 아마 "피도 눈물도 없이"의 제작 기간 내내 류승완 감독의 뇌리 저편에 자리 잡고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하지만 류승완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들의 다양한 모습과 그의 특기인 다찌마와 리(액션) 씬의 한층 화려하고 성숙된 구성으로 충무로의 시스템 속에서 잘 적응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독특한 그의 영화 속 캐릭터들과 이 영화만의 끈적거리는 분위기를 적절하게 조화시킴으로써 또 다르게 진일보된 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또 하나 전도연, 이혜영이라는 배우들을 캐스팅 한데서 흥행을 염두에 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며, 정재영이라는 배우의 발굴과 정두홍 무술 감독의 연기자로서의 모습 그리고 동생이자 이미 스타가 되 버린 류승범의 연기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캐스팅과 배우들에 대한 생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더더군다나 백일섭, 신구, 이영후, 김영인, 백찬기 등의 농익은 연기자들의 연기는 이 영화를 잘 받쳐주고 있으며, 류승완 감독의 독특한 영화적 분위기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유일한 절대악으로 등장하는 KGB역을 연기한 신 구씨의 연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훌륭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의 아버지 역을 신 구씨가 연기했었다는 것을 누가 믿으려 할 것인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네티즌들의 대체적인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정말 많은, 이와 유사한 영화들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은 나 또한 영화를 보면서 문득 문득 드는 생각이었다. 사건의 중심 소재인 돈가방은 데니 보일(Danny Boyle)의 재기 넘치는 영화 "쉘로우 그레이브(Shallow Grave)"를 떠올리게 했고, 영화의 도입 부분은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e Tarantino)의 영화를, 영화 속 인물들은 가이 리치(Guy Ritchie)의 영화들을 생각나게 했다. 또한 여관방에서 각각의 캐릭터들이 만나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은 토니 스콧(Tony Scott)의 영화 "트루 로맨스(True Romance)"를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영화들이 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유사점들은 류승완 감독의 영화와는 분명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무조건 자기 영화에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방식들을 그냥 그대로 갖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영화적 유사성들을 자기의 색깔과 자신의 영화 속에 잘 버무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여관방의 총격씬만 하더라도 토니 스콧의 영화가 그 장면으로써 영화의 파장을 확장시키고, 그 확장 속에서 영화를 종결시키는 데에 반해서, 류승범은 그 장면 후에 좀 더 임팩트가 강한 장면들을 연결시킴으로써 여관방 총격씬 자체의 충격을 축소시키며, 그냥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 점은 또 다른 우리 영화인 "공공의 적"과는 분명 다르다. "공공의 적"의 한 축을 이루는 이성재의 캐릭터가 "아메리카 사이코(American Psycho)"와 너무 닮아있고, 그로 인해 설경구의 캐릭터와 아무런 조화를 이루지 못하며, 두 축의 균형을 잃게 만든 점과 비교해보면 분명 차이가 있다.)
이러한 모방과 차용, 그리고 다른 영화들의 장점들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점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를 더욱 더 옭매었던 것은 이 영화가 너무나 많은 것을 정신없이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캐릭터와 사건들이 조금만 더 정리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상의 데뷔작 -충무로에서 처음 만든 장편 작품이라는 점-인 영화에서 류승완 감독은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여주려고 했었고, 그러한 점을 감안 하면 오히려 보여주고자 한 것이 좀 부족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러한 과잉은 충무로라고 불리는 영화 체계 내에서 류승완 감독이 가졌을 법한 불안감과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욕심이 아니었나 싶다. 물론 조금만 더 정리를 해서 보여주었다 라면 하는 아쉬움이 사라지지는 않지만......
류승완 감독은 이 영화에서 밑바닥 인생들이 마치 투견장에서 싸우는 투견처럼 악착같이 돈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절대적인 악(KGB를 제외하고)도 절대적인 선도 없다. 다만 그들은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면 그냥 괴로움을 조금은 덜어내기 위해서 스스로를 물어뜯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환호하는 다른 사람들의 함성은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다. 마지막 독불(정재영)의 피를 뿜으며 죽어 가는 모습에서 급소를 물리며 죽어 가는 투견의 안타까운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나 뿐이었을까? 영화를 보면서 등장인물들의 처절한 삶의 모습들보다 더욱 더 내 가슴을 불편하게 했던 것은 류승완 감독이 그렇게 사랑했던 자신의 영화 속 캐릭터들의 모습들이 인간에 대한 끈끈한 애정과 관심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독특하고 개성 넘친 캐릭터들이 관객들에게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 영화는 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따뜻함이 영화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인가에 대한 조그마한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류승완 Filmography
*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 2001
* 다찌마와 리 / 2001
* 피도 눈물도 없이 / 2002
* 아라한 장풍대작전 / 2004
* 주먹이 운다 / 2005
* 다섯 개의 시선 中 ‘남자니까 아시잖아요?’ / 2006
* 짝패 / 2006
* 부당거래 / 2010
* 베를린 / 2013
* 신촌좀비만화 中 ‘유령’ / 2014
* 베테랑 / 2015
* 군함도 / 2017
* 모가디슈 / 2021
* 밀수 / 2023
* 본 글은 대자보 22호(1999.10.15)에 발표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