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일에 쫓겨 하루에 30~40씬씩 찍어대는 날들이었다. 그날도 18시간의 촬영을 마치고 편집실에서 가편본을 보고 있었다. 겨울이었고 장시간의 촬영을 한 후, 따뜻하고 어두운 편집실에서 몇 번씩 같은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잠이 스물스물 스며들곤 했었다.
“감독님, 백샷 좀 찍어주세요”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편집하시는 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하나마나한 변명.
“아…예… 낮씬은 좀 찍었는데 밤씬은 라이트를 뒤집어야 해서… 시간 때문에…”
“네. 그래도 힘드시더라도 찍어주시면 배우들의 감정이 조금 더 풍부해질 거 같아요”
‘감정의 풍부함’
그래, 앞모습에서는 알 수 없었던 감정의 다른 부분들을 때론 뒷모습에서 찾아내곤 했다, 그 감정이 무어라고 설명할 순 없었지만.
명절 연휴를 보내고 서울로 돌아가는 아들내미를 배웅하기 위해 역까지 오셨다가 뒤돌아 집으로 가시던 부모님의 모습에서,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당차게 서둘러 돌아서던 그(그녀)의 모습에서,
여러 잔의 술에 몸도 맘도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걱정말라며 내가 알아서 잘 간다고 뒤돌아가던 친구의 모습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각자의 뒷모습을 직접 볼 순 없지만 타인의 뒷모습에서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뒷모습을 한참 동안 보고 있었다.
지인들에게 책을 선물할 일이 있을 때 가장 많이 선물하는 책中 한 권.
#BorntoRead_HR 이란 태그로 기억에 남기고 싶은 책 정리. 얼마나 할 지, 언제 할 지, 어떻게 할 지, 얼마만큼 할 지 알 수 없지만 문득 문득 한 권씩, 한 장씩, 한 자락의 기억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