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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가만히 좋아하는 - 김사인 (2014, 창비) 누군가는 물어봅니다, 시집을 왜 읽냐고.그 질문에 딱 맞는 이유는 없지만, 한 가지 점은 분명합니다. 시(詩)는 분명 저를 항상 편안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실 이 편안함이 제가 시(詩)를 읽는 전부일겁니다.누군가로부터 상처입어, 뾰쪽하게 날이 설 때마다, 시집 속의 시어(詩語)들은 저를 위로하고, 그 감정의 뾰쪽함을 무디게 만들어 줍니다.시인이 되고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서정윤 시인의 ‘홀로서기’,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 등 어릴 적 뜨거웠던 시집들을 마주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을겁니다. 고등학교때는 무언가 쓰고 싶어서 시(詩)라 하기엔 민망한 잡설들을 끄적대기도 했습니다.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치만 그 중 하나의 제목은 ‘타락한 천사에게’ 였습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상처입어, 그 울분(?)을 달래.. 더보기
[二十一世紀映畵讀本] 라이브 플래쉬 (Carne Trémula) directed by Pedro Almodóvar 육체에 집착하고, 꼬여 있으면서 묘하게 격정적인 감정들, 분노, 스페인 특유의 화려한 색채 그리고 잔인한 유머.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의 스타일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특별한 자기만의 스타일로 잘 알려진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1997년作 '라이브 플래쉬'는 우리에게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그간의 알모도바르의 영화들이 흔히들 말하는 영화의 정공법 -잘 짜여진 플롯, 인물들과 사건 사이의 유기적 연결, 시·공간의 조화 등-을 무시하고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그것이 한편으로는 어색했지만 한편으로는 환호하며 그만의 영화를 즐기는 재미를 맛보고는 했다. (이러한 이유로 알모도바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적 감독이라 불리기도 했다.)'라이브 플래쉬'는 이러한 즐거움을 .. 더보기
006 뒷모습 (Vues de dos) - 미셸 투르니에 • 에두아르 부바 (Michel Tournier • Édouard Boubat) • 김화영 (2019, 현대문학) 방송일에 쫓겨 하루에 30~40씬씩 찍어대는 날들이었다. 그날도 18시간의 촬영을 마치고 편집실에서 가편본을 보고 있었다. 겨울이었고 장시간의 촬영을 한 후, 따뜻하고 어두운 편집실에서 몇 번씩 같은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잠이 스물스물 스며들곤 했었다. “감독님, 백샷 좀 찍어주세요” 꾸벅꾸벅 졸다가 깜짝 놀라 편집하시는 누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하나마나한 변명. “아…예… 낮씬은 좀 찍었는데 밤씬은 라이트를 뒤집어야 해서… 시간 때문에…” “네. 그래도 힘드시더라도 찍어주시면 배우들의 감정이 조금 더 풍부해질 거 같아요” ‘감정의 풍부함’ 그래, 앞모습에서는 알 수 없었던 감정의 다른 부분들을 때론 뒷모습에서 찾아내곤 했다, 그 감정이 무어라고 설명할 순 없었지만. 명절 연휴를 보내고 서울로 돌.. 더보기
[二十一世紀映畵讀本] 피도 눈물도 없이 directed by 류승완 류승완 감독의 새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는 많은 기대를 갖고 기다린 영화다. 이렇게 학수고대 기다린 것은 바로 2001년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라는 이상한(?) 모습의 영화로 하루아침에 스타 감독이 되어버린 류승완 감독의 실제적인 충무로 첫 장편 영화이기 때문이다. 류승완식 영화 만들기 또는 류승완 스타일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만들기가 과연 이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점 때문에 우리는 그의 영화를 기다렸다. 물론 이러한 점은 적지 않게 류승완 감독 자신에게는 큰 짐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대로 이 영화 "피도 눈물도 없이"를 만들 때 가장 그의 마음을 혼란하게 했었던 영화는 바로 로버트 로드리게즈(Rober.. 더보기
[二十一世紀映畵讀本]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Crna macka, beli macor) directed by Emir Nemanja Kusturica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 이후 에밀 쿠스트리챠(Emir Nemanja Kusturica)는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을 했다. 물론 "설마 정말 영화를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언더그라운드'로 비정상적인 융단 폭격을 받은 그로서는 어쩌면 정말 심각하게 고려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르비아계를 옹호했다는 서방의 공격과 反세르비아계의 영화라는 세르비아 측의 이야기들은 에밀 쿠스트리챠를 분명 난처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진짜로 영화를 그만 둘까? 그만두면 안 되는데. 이건 분명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계의 또 다른 한 명의 천재라고 불리는 그의 영화를 다시금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우울한 이야기이다. (특별히 에밀 쿠스트리챠를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서는.. 더보기
005 공산당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 -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Karl Marx • Friedrich Engels) • 이진우 (2012, 책세상) 그런 시절이 있었다. 정치적으로 꼭 미묘한 사건이 없더라도 학교 정문 앞에 쭉 늘어선 경찰과 전경들이 등하교길의 학생들을 불심검문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신분증과 학생증을 요구하고, 가방 속의 물품들을 다 꺼내어 뒤져 보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물론 법적으론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주민등록증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고향 주소지로 인해 경찰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매번 받아야만 했지만 한 두번 겪다보면 익숙해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사실 가방에 뭐가 있는 지도 모른채로 등교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부분은 숙취로 인해서지만) 문제의 소지가 있는 책들이나 인쇄물들은 거의 담아두지 않았다. 막스 베버의 서구 자본주의 성립과정을 다룬 ‘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 더보기
[二十一世紀映畵讀本]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 (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Directed by Guy Ritchie 제목부터 심상찮은 냄새를 풍기는 영화. 기대 반, 그냥 재미 반으로 극장을 찾아갈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웃다가 지칠 정도로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의 끝에는 정말 공허만이 남아 있다. (언제나 하는 이야기지만 영화가 꼭 심각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의도된 웃음과 가공된 이야기가 너무나 뻔하게 속내를 드러내면 보는 이의 입장은 정말 난감하다.)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역시나 시나리오이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잘 이끌고 있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하지만 이런 뛰어난 시나리오는 너무나 잘 꾸며져서 작가의 의도대로 관객이 수동적으로 따라오기를 철저하게 요구하고 있다. 물론 요즘 대부분의 영화의 추세인, 이러한 수동적인 이야기 따라잡기가 영.. 더보기
004 모비 딕(Moby Dick; or The Whale) - 허먼 멜빌(Herman Melville) • 김석희 (2014, 작가정신) 재밌는 소설, 이야기. 내게 있어 재밌는 소설? 이 물음은 ‘좋아하는 작가는?’이란 물음과는 묘하게 다른 구석이 있다. 가브리엘 마르케스, 오에 겐자부로, 필립 로스, 박경리, 천명관, 박완서, 오정희, 윌리엄 포크너, 아베 코보, 살만 루슈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버지니아 울프, 세르반테스도 좋아하는 작가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들의 소설들을 조금이나마 읽었다고 하기엔...... 마쓰모토 세이초의 이야기들은 정말 재밌지만 왠지 조금 부족한듯 갈증이 났고, 최윤, 이승우 작가는 열렬한 팬이다. 앞으로 더 재밌게 읽을 소설이 있겠지만 지금 나에게 가장 재밌었던 소설 한권을 뽑으라면 ‘모비 딕’이다.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캐릭터에 완전히 압도되었던 소설. 캐릭터에 의해 이야기가 발전하고, 그 발전한 이야기.. 더보기